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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택부 선생님의 선집 9권, 인간 신흥우가 출간되었음을 알립니다.
청소년과 놀이문화연구소 조회수:1397 59.9.113.23
2021-03-22 17:45:43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에 이르는 격변기,
계몽운동가, 학자이자 교육가, 외교관이었던 신흥우에 대한 기록

인간 신흥우의 생애와 업적
서재필로부터 민주주의 사상을 배우고, 아펜젤러 선교사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신흥우. 그는 1920년부터 1934년까지, 1954년부터 1957년까지 거의 20년간 한국 YMCA 총무로 일하였고, 일본 YMCA로부터 한국 YMCA의 자주권을 확립한 인물이다. 학생회 회장으로 일하던 당시 정부 전복을 꾀한다는 주장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03년 봄부터 1911년까지 미국 남가주대학(Southern California)에서 공부한 그는 1911년 6월초 배재학당 교감으로 취임하여 이듬해 1월에 당장(堂長)에 임명되었다.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교육, 민주주의 교육을 이끌었고, 당시 국민의 85퍼센트를 차지하던 농촌과 농촌 청소년들을 각성시켜야 온 나라가 잘산다는 신념으로 농촌 사업 3대 강령을 천명하여 농촌복지, 농촌발전에도 공헌을 하였다. 창씨개념의 오점을 남기기도 한 그는 초교파 연합운동과 한국 기독교 토착화운동에 앞장섰고 해방 이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인간 신흥우》는 1971년에 범우사에서 나온 것을 전택부 선생 탄생 100주기에 맞추어 내용 교열과 본문 및 표지 조판을 거쳐 내는 것이다.

서문

제1부
1. 인물화를 그리듯
2. 선비 가문에서
3. 일곱 살 때 고향을 떠나
4. 열두 살 때 배재학당에
5. 신학문의 선봉을 달려

제2부
6. 민주 선봉의 직계가 되어
7. 3년간의 감옥살이
8. 아버님이 충신의 전기를 차입
9. 감옥 안에 학교 설립

제3부
10. 법정에서 애국광을 변호
11. 적을 죽이고 나도 죽자
12. 정든 님이 그리워서
13. 성 어거스틴의 변론이라 할까

제4부
14. 30세 때 배재학당장이 되어
15. 교세를 타면 될까 해서
16. 막상 일터에 나서고 보니
17. 대(大)배재로 만들려고
18. 인민은 곧 왕이다

제5부
19. 황제의 밀사가 되라고 해서
20. 한국의 갱생을 위하여
21. 생명의 위험과 환난의 연속
22. 배재에서 권고사직을 당하기까지

제6부
23. 제2차 독립운동
24. YMCA 총무로 취임하여
25. 청년회가 독립이 되게
26. 해외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27. ‘Independence’를 ‘Individuality’로 고쳐 쓴 기지

제7부
28. 현실 파악과 방향 모색
29. 조사에서 사업 착수까지
30. 농촌사업의 정신과 인사 배치
31. 국제 조사단과 사업의 규모


제8부
32. 예루살렘 선교대회에 한국 대표로
33. 정신적 발전소 건설을
34. 유사시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35. 약한 여성을 도와주다가

제9부
36. 청년회가 민족운동의 센터가 되게
37. 비밀 결사를 만들어 가지고
38. 결국 YMCA를 떠나야만
39.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0. 한국 Y는 일본 Y동맹에 예속되고

제10부
41. 감격의 8・15를 맞이하여
42. 이승만의 도미를 가능하게
43. 영자신문 〈The Union Democrat〉 발행
44. 단명 외교관으로 정계에 투신

제11부
45. 민족의 비극을 호소하러 다시 해외에
46. 제2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47. 폐허가 된 서울 거리에서
48. 민권 수호 전선에 서서
49. 긴 여음에다 시조를 싣고

제12부
50. 여화(餘話)

금하 신흥우 박사는 1883년 양력 3월 26일, 아버님 신면휴(申免休)와 어머님 안동 김씨 부인의 3형제 중 막내 아드님으로, 지금의 충청도 청원군(*현재는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묵정리(墨井里)에서 태어났다.

가계에 대해 말하면, 멀리 신숙주(申叔舟, 1414-1475)3에게까지 올라가야 한다. 신흥우 박사는 신숙주의 16세손이며, 2세손 신광윤(申光潤, 1468-1554)4 대에 서울에서 지금의 묵정리로 낙향하여 신씨 가문을 이루고 대대로 살게 되었다.
신광윤이 낙향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서였다. 즉 연산군의 생모 윤씨에게 사약을 먹여 죽이는 소동과 관련하여 1498년 무오사화가 있었고 1504년에 소위 갑자사화가 있었는데, 신광윤은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한 당시의 거물 윤필상(尹弼商)의 외손녀사위 되는 사람이다. 엎치락뒤치락 정변이 반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참형당한 사람의 일가인 그의 신변이 안전할 리 없었다. 신광윤은 화를 면하기 위해 파직하고 멀리 시골로 가서 숨어 살기를 결심한 것이다.
(/ p.18) ‘2. 선비 가문에서’
 
재판 결과 장인환이 10년 징역을 언도받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수백 명이 대낮에 행길에서 다 보고 세상이 떠들썩했던 사건에 대하여, 아무리 생명을 귀중하게 여긴다 해도 무기징역이나 1년 징역이 된다든지 하면 몰라도 재판장이 10년 징역을 선고하는 것을 볼 적에 나는 속으로 말이죠, 야, 미국 국민은 전체가 이런 문제에 대해 상당히 동정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장인환은 필경 7년가량 징역살이를 했는데, 그는 감옥 안에서 품행이며 마음씨가 다 훌륭하다고 해서 미리 석방된 것입니다. 그는 선천(宣川) 사람인데, 그 후 우리나라에 와서 고향에 가서 장가들고 부인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가는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 허나 혼인해 가지고 잘 살다가 어째 그랬는지 내용을 들어보지 못했지만 결국 4층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말을 풍문에 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신 박사가 미국 남가주 대학의 문리과대학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26세의 피 끓는 청년으로서, 애국하다 잡혀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 장인환을 구출하기 위해 애쓴 이 이야기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것이기에 소개했다.
(/ p.71) ‘10. 법정에서 애국광을 변호’
 
신 박사는 처음에는 당황했다. 허나 국내 동지들은 간선제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이상 국회의원 대다수가 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드는 만큼 신 박사가 출마한다면 가망이 많다는 것을 역설했다. 신 박사 역시 처음에는 낙관하며 동지들에게 대통령 출마를 약속했다. 간선제를 직선제로 개헌하면서까지 번의(翻意)하는 이 대통령에게 신 박사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자 동지들은 다 같이 신 박사에게 출마를 포기하도록 간곡히 권했다. 신 박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미국에 있는 동지들에게 공약을 했으므로 만약 포기한다면 그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며, 둘째로 한번 결심한 바에는 되든 안 되든 끝까지 해보는 것이 떳떳하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김호(金乎)8 씨가 25만 달러라는 거액을 선거 자금으로 주면서까지 밀어주는데 중도에 포기한다면 친구의 의리상 안 될 말”이라고 딱 잘라 말할 때는 누구나 더 이상 권할 수 없었다.
(/ p.294) 46. 제2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영어 실력으로는 신 박사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결코 쓰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일상 대화에서 서툰 영어를 쓰는 것을 볼 때면 참을 수가 없었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을 면박하거나 핀잔을 주지 않고 한국말을 아름답게 쓸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었다. 일례를 들면 ‘넥타이’는 ‘댕기’, ‘양말’은 ‘버선’, ‘와이셔츠’는 ‘속적삼’, ‘연필’이나 ‘만년필’은 ‘붓’, ‘드라이버’는 ‘나사손’, ‘파이어 플레이스’는 ‘벽화로’ 등등으로 썼으며, 아무리 새로운 말이나 물건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우리말을 발견하여 토착어로 아름답게 썼다.
이와 같이 그는 너무나 앞서고 너무나 잘 알고 세련되었기 때문에 상대방이 먼저 일종의 소외감이라 할까, 열등의식이라 할까, 자격지심 같은 것을 느껴 그런 혹평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신 박사는 그들을 상대하여 왈가왈부하지 않고, 오직 침묵을 지켰다. 반면 미국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게 우월감을 갖고 으스댈 때는 가차 없이 그 사람을 혼내 주었다. 어쨌든 그는 성미 탓으로 이유 없는 오해를 받은 적이 많다.
(/ p.325) ‘50. 여화(餘話)’ 
 
전택부 [저]
호는 오리(吾里). 함경남도 문천 출생. 1940년 도쿄 일본신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1941년 같은 신학교 본과를 중퇴했다. [월간 새벗]과 [사상계]의 주간을 지냈으며, 소천 아동문학상 운영위원장, 서울 YMCA 총무 및 명예총무, 한글전용국민실천회 회장, 한글인터넷추진 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이후 [한국 기독교회사 만필], [토박이 신앙산맥], [양화진 외인 열전] 등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한 교회사 연구에 정진했고, 한국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을 토박이 신앙인의 신앙역사로 보려는 ‘토박이 사관’을 새롭게 시도했다. 한글 운동을 한 공로로 1978년 문교부 장관 표창, 1980년 외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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